문득, 문화의 다양성을 떠올리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시쳇말로 짧고 굵게 혹은 가늘고 길게 살 수도 있다.
남을 위해 사는 삶, 혹은 철저하게 남에게 기대 사는 삶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삶 가운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구분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 왜냐하면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기보다 그냥 본인이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삶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 또는 그 삶 자체를 본인이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전 나는 샴쌍둥이에 관한 TV프로를 본 적이 있다. 프로를 보면서 생기는 의문은 왜 사람들은 샴쌍둥이가 태어나면 성공확률이 낮은 분리수술을 시도할까 하는 것이었다. 붙어서 태어나는 아이는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을 하는 것일까. 태어난 아이들 스스로가 둘 중 하나를 희생하거나 혹은 둘다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살면서 불편하니까 "옆에 동생을 떼어버려 주세요. 걔는 죽어도 상관없어요…"라고 요청이라도 한다면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분리수술은 성공확률이 극히 희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샴쌍둥이 대부분이 장기나 내부기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 샴쌍둥이를 소개했다. 아마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했으면 둘 다 버젓이 살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신체가 붙어있어서 마지못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데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직업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태어나자마자 살 기회를 박탈당했던 샴쌍둥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샴쌍둥이는 반드시 분리해야 한다는 사회적통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샴쌍둥이의 의지보다는 차마 그것을 인정할 수 없는 주변인들, 즉 사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자신들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사회가 생명과 삶을 살 기회, 행복을 느낄 권리를 앗아가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눈 앞에 몸이 붙어 있는 흉측한 모양의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마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본인이 불편하기 때문에 싫다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을 통해 다양성을 포용하는 시각을 조금씩 넓혀왔다. 게이, 여성인권, 환경, 아동학대 등은 지금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들은 우리가 인정하기 훨씬 전인 과거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좁은 시야로 자신만을 돌보며 매 순간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남의 삶을, 행복의 기회를 뺏는 좁은 시각은 조금씩 넓혀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와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사장(saralee@e-z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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